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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의 역사 - 중세의 음악2

2008.01.19 21:10

김동현 조회 수:3540

2 - 초기 기독교 음악

중세음악은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이중 종교음악의 밑바탕이 된 것은 '그레고리안 성가'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초기 기독교 음악문화로부터 중세 말까지 영향을 미쳤지요.

그레고리안 성가는 단선율적인 무반주 음악이었습니다. 또한 8개 교회선법을 사용했고 가사는 라틴어였죠. '교회선법'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선법으로 앞서 그리스 음악에서 이야기 한 '하르모니아'에서 온 것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라는 명칭은 서기 600년 경 로마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기간 590∼604)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습니다. 사실 초기 기독교 음악이 정착하는 데에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7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예배 형식이 완성되었죠.

기독교의 예배와 음악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레오 1세(재위 440∼461)와 더불어 바로 그레고리우스 1세 두 교황을 들 수 있습니다. 중세의 정보교류 상태로 미루어볼 때 당시의 기독교는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예배형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에서 행해지고 있던 예배의 방식을 기준으로 정하고 전 유럽 기독교의 예배형식 통일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 지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각 지방의 예배들이 기준에 맞게 이루어지는지를 감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 형식과 기독교 음악의 통일화 과정은 길고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16세기에 북이탈리아의 트리엔트에서 열린 종교회의(1545∼63)에까지 이어졌지요.

단선율 성가의 특징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화려한 음악적 수완을 발휘하는 것에 있습니다. 단선율 성가는 남자 수도사가 노래했으며, 화성(하모니)을 갖지 않는 한 가닥의 음의 선(성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부분 단선율 성가는 음역의 폭이 한정되어 있고, 평균 10도를 넘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선율의 움직임 거의 전부가 음계적이며 인접한 음으로 오르내리고, 도약하는 움직임은 있어도 그 폭은 좁은 편이지요.

각각의 음의 시간적 길이는 같다고 생각되지만 전체의 움직임 속에는 어떤 리듬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특히 공들여 만들어진 성가에서는 라틴어 가사가 지니는 악센트와 선율상의 높낮이 사이에 미묘한 연관성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가사의 한 음절(실러블) 위에서 긴 선율이 불려지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사의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거나 노래가 불려지는 날과 그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축일에 불리는 노래는 가사가 음절적으로 다루어져 1음절에 1음부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중요한 축일에 불리는 성가는 1음절의 가사에 여러 음부로 이루어진 길고도 움직임이 많은 선율이 붙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선율 성가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사의 내용, 예배 과정 중 어디서 불려지는가, 선율의 높낮이와 가사와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면 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그레고리안 성가가 어떤 리듬이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기보법으로는 음 길이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단선율 성가는 몇 세기에 걸쳐, 시대에서 시대로, 입을 통하여, 즉 구전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악보는 교회가 음악을 통일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음악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악보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알려져 있는 최초의 기보법은 이미 성가를 배워 기억하고 있는 가수들이 선율의 형태를 생각해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악보에 사용된 여러 가지 기호들은 선율의 높낮이를 암시는 하고 있지만 정확히 나타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9세기에 이르러서야 현재 우리들이 보통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기보법이 탄생했습니다. 즉 선들과 그 사이의 칸을 써서 음의 정확한 높이를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죠.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공헌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귀도 다렛쪼(Guido d'Arezzo, 991/2-1050)였습니다. 그는 최종적으로 기보법에 대해 기술하고, 이것을 보급시켰지요. 다렛쪼의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귀도 다렛쪼를 포함하여 당시의 수많은 음악이론가들이 악보를 적는 방법과 성가를 간단히 외우는 방법들에 대해 설명은 하였지만 실제로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성가가 한 가수에서 다른 가수로 전해지는 것이어서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이 단선율의 아름다운 성가들이 인간의 영혼을 하느님 가까이에 데려다 놓는다고 믿었습니다. 성가의 미는 완전하다는 생각이었죠. 훗날 발전된 교회음악의 리듬은 성삼위일체(성부, 성자, 성신)와 일치하는 삼박자 계열을 고수했는데요, 이러한 것들도 당시의 믿음들에 비추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미사와 성무일과에 쓰였습니다. 미사는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하루 중 가장 크게 드리는 예배의 틀이지요. 초기의 미사는 전체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1부는 '쉬나크시스(Synaxis)'로서 거듭나지 않는 교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목적으로 했고, 2부는 '유카리스트(Eucharist)' 즉 성만찬을 포함해 거듭난 교인들의 예배를 주내용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이 때의 미사에 쓰여졌던 성가들은 오늘날 미사에서 부르는 노래들보다 훨씬 수가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던 미사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더 많은 순서와 항목들이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미사에 관련된 음악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을 위한 음악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미사의 음악에서 성가대의 노래는 부수적인 것이었죠. 오히려 미사 음악은 미사를 진행하는 사제의 모든 동작들을 반주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중세의 사고방식으로 그레고리안 성가란 예술로서의 음악이라기 보다는 예배라고 하는 큰 전체 속의 일부분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한편 Office라고 불리는 성무일과(聖務日課)는 수도사들이 날마다 체계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6세기경 성 베네딕트라는 수도사가 이것의 틀을 마련했죠. 성무일과는 하루 24시간을 8부분으로 나누어 3시간마다 기도와 기도문에 붙인 음악을 행했습니다. 주로 시편을 노래부르곤 했죠.

성무일과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음악이 사용되는 것은 저녁 6시의 기도회인 베스퍼스(Vespers)였습니다. 그 외의 기도시간에는 적절한 성가(Chant)가 선택되어 사용되었지요. 미사와 달리 성무일과에 쓰였던 성가는 '힘누스'(찬가, hymn)입니다

중세인들이 언제나 낡은 것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노력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방금 이야기했던 힘누스(찬가)입니다.  
가사와 악보가 함께 들어있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책. 성무일과에 쓰였던 것으로 시편을 노래하기 위한 주석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힘누스의 선율은 실은 세속에서 불려지던 '유행가'였습니다. 이 유행가에 신앙적이거나 교의(敎義)를 설명하는 가사를 붙여서 성가로 만든 것이지요.

성 암브로시우스라는 사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찬가를 포교활동에 사용해서 큰 효과를 봤다지요. 그런데 찬가가 음악 형식으로서 인정받게 되자마자 음악가들은 이와 비슷한 새 노래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무일과의 성가로 쓰이게 된 것이지요(그러나 찬가가 미사에 쓰이는 일은 없었다는군요).

그렇지만 힘누스는 이렇게 성스럽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유행가로서의 소박하고 단순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다른 성가와 구별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선율에 새로운 말을 붙이거나 새로운 선율을 덧붙이는 수법을 '트로푸스(Tropus)'라고 합니다. 트로푸스는 힘누스뿐만 아니라 다른 성가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예컨대 <할렐루야>가 그런 경우입니다.

원래 할렐루야는 마지막 부분에 유빌루스라고 불리는 장대한 합창, '멜리스마'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멜리스마는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멜리스마의 선율을 기억하는 수단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편에서 따온 가사에 주석을 덧붙이기 위해서 선율에 말을 덧붙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힘누스와 마찬가지로 새 가사뿐만 아니라 새 선율도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가들을 '세쿠엔치아(시퀀스: 속창)'라고 불렀는데요, 굉장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세쿠엔치아는 16세기까지 거의 매일 미사에서 쓰였고 각 지방의 수많은 교회들은 저마다 독특한 세쿠엔치아를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세쿠엔치아는 <위령 미사곡>(통칭 레퀴엠)에 포함되어 있는 <디에스 이레(분노의 날)>일 것입니다. 이 선율은 베를리오즈, 리스트, 라흐마니노프뿐만 아니라 수많은 후대의 작곡가들에 의해 사용되었지요.

그렇지만 16세기에 트리엔트에서 있었던 종교회의는 5곡의 세쿠엔치아만 미사에 남겨놓고 나머지는 금지하면서, 끝내는 모두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트로푸스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했지요.

그렇지만 몇몇 키리에에는 아직까지도 트로푸스로서 덧붙여져 있던 가사를 제목의 속칭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키리에 <하느님이시여, 전능하신 창조주(Cunctipotens Genitor Deus)>가 그런 경우죠.

또 하나 초기 교회음악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례극'입니다. '전례극'이란 특정한 축제일을 위해 성경 속의 한 장면을 연극으로 만든 것입니다. 전례극은 옛날부터 『마태복음』 중 수난장면을 3종류 목소리 높이로 구분하여 썼던 것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복음 전도자(에반겔리스트)의 말은 중간 목소리로, 예수의 말은 낮은 목소리로, 무리(군중, '투르바'라고도 함)은 높은 목소리로 나눠 불렀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에 다시 가사와 선율이 붙여지고 연기와 무대 배경이 덧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음악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부활절에 연출되곤 하는 세 명의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11세기 이후 전례극의 소재는 더욱 다채로워져서 <다니엘 극>, <성 바울의 회심>, <최후의 심판> 등이 유명해졌죠.

9세기에 이르러 중세의 교회음악은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그 중 가장 획기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성음악의 출현입니다. 초기의 다성음악은 주로 성가에서 시도되었는데, 성가에서는 맘껏 화려함을 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다성음악으로서 성가의 예로는 우선 솔로가 나오고, 그 다음 응답의 합창이 나오는 응답송(Reponsorial Chant)의 솔로 부분을 들 수 있습니다.

초기 다성음악의 형태는 '오르가눔'이라고 불렸습니다. 오르가눔은 시대에 따라 대선율을 본래 선율에 그대로 병행해서 붙이는 평행 오르가눔에서 자유 오르가눔, 화려한 오르가눔의 순서로 13세기까지 발전되어 나갔지요.

특히 9세기는 샤를마뉴 대제가 문예부흥을 일으켜 음악교육에도 힘을 쓰던 때였기 때문에 성가의 다양한 확대와 발전이 용이했습니다.

출처...한국문화예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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