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가짜 방언과 가짜 돈십일조에 속고 속이는 사역자들 기본 카테고리

etc_06.gif?v=2 일반인및 시각장애우를 위한 20분 오디오, https://youtu.be/_xRKhiCuiLk

etc_10.gif?v=2  Jesus Kingdom 한국교회의 회개와 개혁 메시지 모음 things_14.gif?v=2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

'예수님 유일신'을 신구약 성경의 한분 하나님으로 믿는 장로. 집사. 목사. 선교사. 성도는 진실로 복이 있습니다. 성경대로의 '예슈아 유일신' 신관을 믿고 전하기 때문이지요. 삼위일체나 양태론을 끝까지 성경적이라 하는 사역자들은 단단히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아셔야만 합니다. 세상 종교의 신관은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을 앞세운 거짓 신을 나름대로 믿는 것이지만, 개신교와 독립교회가 3신을 유일신이라고 한다던지, 3신이 세가지 형태로 바뀌어서 지금은 성령이 유일신이라고 한다던지 하는 것은

중세 로마 가톨릭 시대의 다른 하나님 신관 두가지를 쫒아가는 것이니, 속히 돌이키시기를 부탁합니다. 한국교회 회개와 개혁의 메시지 오늘 제목은 가짜 방언과 가짜 돈십일조에 속고 속이는 사역자들 입니다.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가짜 방언에 대한 질문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가짜라고 하는데, 방언의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이웃교회인 독립침례교회의 많은 자료의 답변 중에서 일부분 입니다.

성령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사도들로 하여금 천하 각국의 지방어에 해당하는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 성령의 강림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날 은사주의 중심의 오순절 계통 교회들은 지방어인 방언의 지속성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지방어로 방언 말하게 하신다는 믿음을, 히브리서 138절을 앞세워 붙들고 있지요. 초대교회 당시에 혼란스러웠던 고린도교회는 지방어가 아닌 '알지 못하는 방언' 으로 말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방언은 알아 듣지 못하는 소리로서, 다만 의미 없는 소리를 허공에다 하는 것이며, 자신은 하나님께 신비의 언어로 말한다고 하지만, 성령이 아니라 자신의 영으로 하는 것으로, 결코 유익한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2절에서,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라는 것은 지방어가 아닌 방언으로 혼란스러운 말이라는 것이며,

자신의 영으로 말하는 유익하지 못하다는 부정적 의미의 언어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영이 그의 혼에게 말해 준다면, 그 영은 어떤 초자연적인 원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거나 마귀의 영입니다.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는 알지 못하는 언어의 방언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이 그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피동적인 상태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집회는 계속 반복되는 빠른 찬송과 박수 소리와 인도자의 부르짖음으로 분위기가 고조 되고, 육신의 흥분과 감각이 동요됨으로 최면 상태인 무아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의 의지는 완전히 피동적이 되며, 자신들의 몸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자기 입과 혀를 사용하여 방언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를 반복적으로 무아지경에 이르게 하면서 부르짖습니다. 악한 영은 그때에 틈을 이용해 그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에베소서 427절과 누가복음 1024절 부터 26절 까지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비밀의 문으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사람들이 손을 들어 부르짖으며 그 문으로 들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꼬부라진 혀는 그 문을 여는 열쇠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의미 없는 소리들은 마귀가 혼잡케 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는 마귀의 생각을 나타내며, 그들의 공통적인 믿음의 열매는 비성경적 입니다. 마귀의 생각은 항상 진리 말씀을 왜곡하고 자기 경험에 의한 믿음을 진리 위에 두게 합니다.

그런 맥락으로 볼 때, 오순절 때의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 제자들 중에서 사도 12명만 다른 언어인 지방어로 말했고, 나머지 108명은 어떤 다른 언어인 방언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만일,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이 성령 침례의 증거라고 가르치려면 최소한 4가지의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첫째, 다른 언어에 해당하는 방언이라고 하는 지방어로 말한 제자들의 숫자가 12명이 아니라, 120명이 방언을 했다고 거짓말해야 합니다. 둘째, 사도행전 22절부터 3절에 나오는 성령침례의 증거에 대해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아니라, 방언을 했다고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셋째, 사도행전 2장의 실제적인 외국어들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알지 못하는 언어가 동일하다고 가르쳐야만 합니다. 다만, 사도행전에 있었던 외국어 방언은 오늘날에도 복음 전도의 현장이나 선교 현장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은사라는 점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8절에서 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에 감사하고 있으며,

이러한 외국어 방언의 은사라면 막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음도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닉네임을 밝히지 않은 분께서 십일조에 관련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저는 5년 전에 캐나다로 갔다가 몇개월 전에 한국으로 다시온 사람입니다. 캐나다에서 교회를 다닐 때는 십일조 같은 건 없었는데, 여기 한국은 처음 듣는 헌금이 많더군요. 한국에서만 십일조를 거두는 것인지.. 아니면, 캐나다에서만 걷지 않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몇 분의 답변을 소개하겠습니다. 닉네임이 bhang813 이라고 밝힌 사역자의 답변 중에서 일부분 입니다. 저는 다만 역사적으로 십일조가 우리나라 교회사의 독특한 상황으로 인해 정착된 제도라는 점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개신교회가 120년의 역사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성장은 교인들의 철저한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에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의 선교 정책은 한국 현지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네비어스 정책이라고 부릅니다. 100%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당한 몫의 금액을 한국 교인들이 십시일반 조달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즉, 하나라도 교회를 더 지어야 하는 초기 한국 교회의 성장기라는 맥락에서 십일조라는 제도는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의 제도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역사적 과정을 자세히 언급한 논문을 아직 접하지 않아서 확실히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제 생각에는 한국의 십일조가 1900년대 초.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때에 교회 헌금 열풍이 몰아 닥치던 시기에 일반화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는 초기 한국 교인들이 교회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제도입니다. 십일조의 경우 그 근거가 구약인데.. 그러니까, 신약에 의해 폐지 되었다고 보는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기에, 그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인지에 대한 논란 거리가 많습니다. 지금은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godcan 사역자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미리' 사하시는 일로 인하여, 더이상 '구약'은 의미가 없어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시대의 일을 당연히 알아야 하고.. 또, 그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하지만, 그 때의 율법을 지금의 신약교회에서도 100% 지켜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tgarden 사역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짧고 간결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조누가' '십일조를 넘어서' 라는 책자를 보시면, 우리가 십일조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결론은, 십일조는 요즘 기독교인 의무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닉네임을 밝히지 않은 분의 답변 중에서 일부만 소개하겠습니다. 선진국은 미국의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는 헌금 바구니를 돌리지 않거나 십일조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십일조 강조는 미국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절대 순종을 요구해 왔고, 지금도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시 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주권을 쥐고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명예. 권위. 수입과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소득의 10분의 일에 해당하는 십일조는 구약 성경에서 언급하는 단어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제정일치 시대의 세금이었지요. 국민은 누구나 납세의 의무를 갖습니다. 구약에만 해당하는 십일조는 이스라엘 나라의 국민들 세금입니다.

십자가 대속을 감당하시기 전의 예수님 공생애 기간이었던 구약시대에 십일조 징수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몇 곳에서 십일조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이는 예수께서 외식과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실 때에 잠시 언급되고 있지요. 누가복음 1142절과 마태복음 2323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공의. 사랑. 은혜, 신앙은 저버리면서 허식과 위선으로 십일조를 논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로마 통치 아래 들어가면서 문제는 시작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말씀으로 세금을 로마 정부에 납부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말합니다. B.C 37년부터 A.D 14년까지 가이사는 최초의 로마 황제였으며,

A.D 117년부터 138년의 하드리안 때까지 모든 로마 황제들에게 붙여진 왕통의 이름으로 상속되었지요. 이것은 성전에 십일조도 드리고, 로마 정부에 세금도 따로 납부하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세금에는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이중과세가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따라서, 선진국처럼..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정부에 납부하는 세금을 면제 받아야 하고, 우리나라처럼 일률적으로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는 경우에는 교회에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부에 납부하는 세금과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부가 집행하는 세속적인 사업과 교회의 복음 사역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억지 주장을 펴면서도, 그 많은 교회 수입에 대하여는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모두 독식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시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1640년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 라우드는 교회 운영이 어렵게 되자,

십일조를 인상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만들었지요. 이 당시 청교도를 중심으로 일부 양심 있는 지도자들은 십일조 제도를 폐지하고 자진해서 연보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유럽 교회에서 십일조의 악폐가 점점 사라졌으나, 근래에 들어서 오순절교회인 흑인교회가 미국에서 유럽으로 역수출 되면서, 미국자본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팽배해지고 십일조를 강요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이어서, proship 사역자의 답변입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교통을 하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는 하나님과 우리가 직접 교통이 가능해졌습니다. 즉, 우리 각자가 제사장이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십일조는 바로 우리 각자 자신이 받아야 되는 것이라는 논리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후에는 십일조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초기에는 믿는 사람들이 몹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드리는 십일조가 있었다면 반드시 신약 성경에 언급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런 말이 성경에 없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믿음이 너무 강해서 십일조에 대한 어떤 문제의 소지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신약시대 초기 순교자가 끊임없이 나왔던 그 믿음이 강성한 시기에도 십일조는 없었습니다. 즉, 신약 이후에 성경 내에서 십일조에 대한 의무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자발적으로 믿는 사람이 십일조를 드리겠다면 막을 방법은 없지만,

신약교회에서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신약 이후, 땅 위에 목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양떼에 불과합니다. 목자는 오직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뿐 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도 양떼에 불과합니다. 목자가 없다면 지도자급의 양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선한 목자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세속적인 예배당 키우기와 목사들의 고급 저택, 고급 자가용 유지를 위해 우리의 피땀을 낭비하는 것을 하나님이 정말 원하실지를 기도해 봅시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하는 십일조가 하나님을 상품화 시키는 세상을 만드는데에 일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enventok 사역자는 아주 짧게 요점만 남겼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는 게 아니라, 인간이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웠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일반인이었고 가난하지만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지, 신학대학을 나와서 학식과 능력을 갖춘 분들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상입니다.

지금까지, 십일조에 대한 답변 중에서 십일조 폐지론자들의 답변만 소개해 드렸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든지, 십일조를 바쳐야 복을 받는다든지 하는 거짓말을 답변으로 채택해 보아야, '비성경적인 돈십일조는 가짜이다' 라는 성경적인 답변과 충돌하기 때문에 배제했음을 이해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1960년대 가난했던 초등학교 5학년 시절! 가짜 성탄절 날에, 떡이나 빵을 얻어 먹으려고 자진해서 교회 나갔다가, 한달 만에 교회를 떠난 이유는

유년부 예배에서 헌금 바구니 돌리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일 때는 이웃교회 고등부 회장과 부회장이 찾아와서 교회로 나와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고 고등부 예배에 출석했지만, 전도한 사람들은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아 다음 부터는 교회를 가지 않았고, 그들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지들끼리 논다고 생각했습니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는 주일 낮예배와 주일 밤예배를 비롯하여 수요일 밤예배까지 다녔지만,

찬송만 부르고 설교시간에는 잠을 푹 잤던 나이롱 신자였습니다. 성령과 말씀을 체험한 1982년 이후에는 30년이 넘도록, 십일조. 주일성수, 주일밤. 수요밤. 금요밤. 새벽예배. 교회 봉사. 가정예배. 교회 조직의 율법주의자로 살았고, 1992년에는 가짜 방언인 줄도 모르고 방언을 사모한 나머지, 차량 안에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혀가 풀리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요상한 소리를 내면서 나도 드디어 방언 받았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단이 준 가짜 방언으로 찬송도 부르고 방언기도 라는 것을 하면서, 이 신비한 은사가 녹슬지 않도록 틈틈히 사용해 오다가, 느닷없이 뜬금없이 내가 받은 방언이 가짜였다는 여러 교회의 설교를 접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짜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웃교회의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가톨릭 수녀나 세상 종교인도 개신교회의 이상한 방언과 똑같이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혼란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론입니다. 구약시대에도 돈은 있었지만, 구약의 십일조와 각종 헌물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돈으로 사기쳐서 거두어 들이는 것입니다.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신약은 사람 구제를 위한 각자 자발적인 연보만 있습니다. 각자 연보는 자신이 결정하여 무기명으로 해도 되고, 안 내도 됩니다. 그리고, 신약의 방언은 외국어 입니다. 가짜들을 즉시 중단하십시오! 시각장애우를 위한 오디오는 맨 상단에 있고,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주변에 가까이 계시는 분들의 친절한 안내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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